🌸2022년, 7월27일,28일 <벚꽃동산> 부산공연을 위한 연습시작.
4.벚꽃동산분석
🌸아냐,바랴
아직 현실과 부딪히지 않아 세상물정에 밝지는 않지만 미래를 밝게 바라보는 아냐, 그리고 아냐의 언니이자 라네프스카야의 양딸인 바랴는, 오직 그녀만이 가계를 담당하여 절약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떻게도 될 수 없는 형편이다.
🌸아냐 - 아냐는 라네프스카야의 친딸이다. 여행 중 엄마를도와 집안일을 챙겼고 박식한 빼짜를 좋아한다. 벚꽃동산에 대해 애착을 보이지만 극의 후반부에서 새로운 동산에 대해 꿈을 꾸며 새로운 동산을 만들어 보자고 라네프스카야에게 위로하는 모습에서 어느 정도 실질적, 현실적 대안을 가진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엄마, 우리 함께 여러 가지 책을 읽도록 해요...그럴 거죠? 가을밤이면 우리 책을 읽어요. 그렇게 많은 책을 읽고 나면 새롭고 경이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질 거에요..." 라는 대사에서 느낄 수 있듯이 새로운 동산에 대한 허무적인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녀는 가장 어린 세대답게 새로운 새대로 나아가길 바라는 미완의 신세대다.
🌸바랴 - 바랴는 라네프스카야의 수양딸이다.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불안함의 표현인지 그녀는 지나치게 엄격하며 세심하고 현실적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항상 찾아서 하며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하려 한다. 자신과 비슷한 로파힌을 좋아하고 있으나 쉽게 둘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애매한 위치에 있다. 비록 수양딸이지만 집안 걱정을 많이 하고 특히 동생 아냐에 대해 지극한 사랑을 보여 준다. 결국 마지막엔 벚꽃동산에서 70킬로 떨어진 라굴린댁 가정부로 가게 되고 결국 로파힌과의 관계는 어떠한 해답도 없이 끝이 난다.
영지 주인이자 구세계 귀족인 라네프스카야와 그녀의 오빠 가예프. 이들은 천성이 선량 하지만 세상물정을 모르는 경솔한 사람들이다. 라네프스카야는 매력적인 여인이자 자연과 음악을 좋아하고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 선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인은 정신적인 성숙과 깊이가 없다. 명랑하고 쾌활한 다혈질의 성격 이면에는 정신적 공허와 이기심 그리고
세상을 모르는 비현실성이 감춰져 있다.
체홉은 스타니슬랍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라네프스카야는 현재 아무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과거에서만 사는 노부인이다.’라고 썼다. 이렇듯 자신의 영지가 경매에 들어가고 하인들은 굶주리지만 그녀는 무도회를 열고 악단을 불러 손님들을 초대하고 춤을 춘다.
1903년 11월 2일, 얄타에서 체호프는 단첸코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벚꽃 동산>을 쓰기 위해 3년을 준비했습니다!”로 시작한다. 체호프는 이편지에서 <벚꽃동산> 에서의 ‘동산’이라는 러시아 말 ‘сад’을
‘с <ад>’라고 썼다. 이는 일종의 언어유희로서 동산이라는 ‘сад’의 с 와 ад를 띄어 쓰면서 ‘동산’이라는 뜻이 교묘히 ‘지옥에서’라는 뜻이 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이 편지글은 체호프가 작가로서 느끼는 창작에 대한 고통만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동산’을 ‘지옥’으로 읽히도록 한 이 짧은 문구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체호프의 시선이 숨겨진 알레고리 였을 것이다. 그러나 체호프는 이와 같은 정치적 격변기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그대로 펜에 옮겨 작품을 비극적인 색채로 그려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4대 장막극
(<갈매기>, <바냐 외삼촌>, <세 자매>, <벚꽃 동산>) 모두를 ‘코미디’라고 주장했다. 체호프는 <벚꽃 동산>을 쓰기 시작한 1901년에 자신의 부인이자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배우인 올가 크니페르 체호바(Ольга Книппер-Чехова, 1868–1959)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가벼운 희곡’을 쓰고 있다고 언급하였고, 1904년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서의 공연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작품의 코믹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때의 코미디는 실없이 익살을 부려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하는 극 형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체호프가 언급한 ‘코미디’는 이른바 ‘개념의 코미디’, ‘생각의 코미디’, ‘상황의 코미디’로 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코미디’라는 말 자체에서 풍기는 가벼운 느낌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벚꽃동산에서의 어린이방&
벚꽃동산의 코믹성
<벚꽃동산>에서 나타나는 코믹성은 ‘덜 자란 어른’이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벚꽃 동산>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신체적으로는 완전히 성장한 어른이지만, 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은 순수한 어린아이의 모습을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라네프스카야는 남은 재산이 거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바깥에 나가 외식을 하고, 그때마다 제일 비싼 요리를 주문하고, 웨이터들에게도 팁으로 은화를 건네준다. 게다가 구걸하는 행인에게 금화를 적선하기도 한다. 피르스는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늙은 가예프를 쫓아다닌다. 등장인물들 중 금전적인 부분에 대한 실제적인 대책을 강구하는 사람은 로파힌뿐이다. 하지만 로파힌이 아무리 벚꽃 동산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귀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는다. <벚꽃 동산>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현실적인 사고를하는 어른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로파힌뿐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벚꽃동산’은 개념적, 상황적으로 ‘어린이 동산’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적으로는 어린아이들 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라네프스카야가 집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이 ‘어린이 방’이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바깥의 현실은 이들의 환상이 지속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집안의 재정은 파산 직전이며 '벚꽃동산' 또한 빚 때문에 경매에 붙여진 상황이다. 로파힌이 경매일 이전에 '벚꽃동산'을 벌목해 세를 주면 집까지 모두 팔려버려야 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은 ‘이상한 수작부리지 말라’면서 '벚꽃동산'에 얽힌 옛이야기와 향수만을 늘어놓을 뿐이다. 그러나 벚꽃 동산이 매각되는 경매일은 8월 22일로 확정되고, 그날은 점점 다가오지만 이 ‘어린아이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다.
체호프가 말한 코믹성은 여기서 가장 빛을 발한다. 그것은 ‘덜 자란 어른’에게 닥쳐온 ‘부조리한 상황 에서의 코믹성이다.하지만 우리가 이 덜 자란 어른들을 보았을 때, 부정적이거나 나쁜 쪽으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벚꽃동산>을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스타니슬랍스키는 작품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처럼 코믹한 사람들과 상황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느끼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의 순수성’에 있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사회적인때를 몸에 묻히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이다. 아이들은 계산할 줄 모른다.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진실되며, 거짓을 모른다. 하지만 무대 위 등장 인물과는 달리 객석에 앉은 우리는 이미 가슴보다 머리가 앞서고, 손해와 이익을 구별하는 계산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의 진실성을 관객들은 함부로 비웃을 수 없다. 누구인들 때 묻은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심리에서 <벚꽃 동산>을 지켜보는 어른들은 무대 위 등장인물들의 어린아이 상태를 동경하게 된다. 순수한 모습을 하고 있는 벚꽃 동산의 등장인물들은 우리 모두가 꿈꾸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하여 관객들 사이에서는 그들을 도와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은 연민이 형성된다.
다시 말해 '벚꽃동산'은 등장인물들 에게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에게 꿈의, 상상의 동산인 것이다. 그리고 상상의 동산은 쉽게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스스럼없이 파괴했다가 재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꿈은 잃어버리면 끝이다. 이러한 연유로 4막의 끝에서 은은히 울려 퍼지는 도끼소리, 저멀리서 아련하게 들리는 벚꽃동산을 벌목하는 도끼 소리는 우리가 영원히 잃어버린 순수함과 꿈에 대한 절규에 다름 아닌 것이다.이와 같은 드라마의 시각에서 보면 <벚꽃 동산>은 비극적인 면모를 많이지니고 있다. 어린아이는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면서 보통 자신도 모르게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하나는 어른의 세계로 편입하여 그에 동참해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언저리에서 방황하다 낙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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